2009년 7월 26일 일요일

[류건집 다부] 한(艹 +寒)과 파(菠)에 관하여

오늘 류건집 교수님을 만나뵈옵고 학위 논문도 전해드리고 그동안 차계의 여러사안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최근 출간되는 번역서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는 류교수님은 최근들어 번역서가 많이 나오지만, 차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기에 많은 번역의 오류가 있음에 대하여 아쉬움을 표현하고. 여러가지 사항에 대하여 본의[本意]가 왜곡되어가는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올해 발행된 "다부 주해"의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서 편역자인 류교수님의 뜻을  "석우연담" 블로그를 통해서 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는 의견을 나누게 되면서 그 첫 번째 글을 올리게 되었다.

--茶賦에 나온--  원광디지털대학교 석좌교수 류건집

내가 다부주해(茶賦註解)를 쓰면서 긴 지면을(p80-p100) 할애하여 역점을 둔 것 중의 하나가 한[艹 +寒]과 파[菠]에 관한 것인데, 이에 관해서 아직도 나의 본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서 요약해서 첨부한다.

먼저 결론은 “한[艹 +寒]은 맛이 시고 씁쓸하지만 약효가 많은 고차(苦茶) 계통의 차를 말하고, 菠는 여린 잎을 따서 만든 달고 부드러운 계통의 차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한[艹 +寒]과 菠”는 꽈리나 시금치로 만든 대용차가 아니고, “茗과 荈, 檟, 蔎, 같은 차의 이름이라는 말이다. 곧 앞에 나오는 “茗과 荈”이 차잎의 채취 시기에 의해 분류한 차의 이름이라면, 한[艹 +寒]과 菠”는 色香味에 의해서 분류한 차의 이름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결론이지 무슨 “꽈리차나 시금치차”라는 대용차를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논리를 편 것은 아니다. 중간에 “꽈리나 시금치”라는 글자 곧 ”한[艹 +寒]과 菠“에 어떤 특징이 있기에 한재가 그렇게 분류해서 사용했을까 라는 것을 究明하기 위해서 차로 만들어 본 것이지 대용차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만들어 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다시 말하면 한재가 중국에서 가서 들었던지, 혹은 어떤 글에서 읽었던지 “한[艹 +寒]과 菠”라는 차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은, 내가 제시한 여러 기록들과 특히 “고대에 쓴맛을 가진 일종의 음료였다(古代一種含有酸味的飮料).” [『제민요술(齊民要術)』, 대소릉인(大小夌) 인(引)『범승지서(氾勝之書)』]는 기록으로 볼 때 확실한 것이다. 즉 한재 생존 당시에 차를 분류하여 부르는 “茗과 荈”처럼 “한[艹 +寒]과 菠”라는 차에 관한 명칭이 있었다는 결론이다. 이는 한재같은 도학자가 근거도 없이 임의로 이름을 만들어서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둘은 어떤 차이로 구분해서 설명했을까 하는 의문을 풀어야 했다. 그래서 한[艹 +寒]과 菠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기록들을 조사해서 제시하고 또 만들어 보기도 한 것이다.

그랬더니 그 둘의 차이가 확연한 것이 들어나서 위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원래 차를 뜻하는 “荼는 씀바귀에서, 茶는 동백나무에서, 檟는 가래나무에서, 蔎은 풀의 이름에서, 茗은 단술[酩]에서, 荈은 쓴 씀바귀에서 轉義된 글자들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艹 +寒]과 菠”도 “꽈리와 시금치”에서 전의된 차의 이름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더욱 자세한 것은 졸저 <다부주해 ; 이른아침> p80-p100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책소개 : 도학의 정종(正宗)을 이어받아 군자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설파하고 있는 명저인 『다부』는 원문 자체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지만 기록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연구, 설명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에 편역자 류건집은 철저한 자료 조사와 고증을 바탕으로 원문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보다 풍성한 의미를 얻어낼 수 있도록 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2009년 7월 22일 수요일

종이컵이 진화된 티백 컵

7월20일 배재학당 역사발물관 3층에서 (사)국제차문화교류재단 이진수 이사장의 특강이 있었다. 한국 차마케팅 전략과 인재육성에 대한 주제였다. 강의 시작 10분전에 도착 했지만 별로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소슬다원 오영순 사장 님이 들어오셨다. 차 마실 수 있는 여건이 잘 안된 것 같아서 편리하게 마실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왔다고 하시며 종이컵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나는 혼자 생각으로 차는 언제 주는가 하고 조금은 기다렸는데 다른 사람들은 종이 컵을 가지고 복도로 나가서 물을 담아 와 자신의 자리에서 조금씩 마시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컵을 가지고 나가면 준비된 차를 주고 물을 담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나는 그 순간 강의를 위한 파워포인트 화면을 열고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강의실에는 학우님들이 계속들어오면서 나의 빈 컵을 보고는 들고 나가서 물을 담아 왔다 앗! 근데 이게 이럴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름아닌 종이 컵이 진화된 티백 컵이었다

즉, 대만 오룡차 티백을 둥글게 만들어 종이컵 밑바닥에서 한쪽은 살짝 붙어있고 다른 한쪽은 단단하게 고정된 것이다. 물을 부어면 한 쪽은 접착이 풀어지면서 차는 곤두서있게 된다. 그러면서 물에 의해서 천천히 차가 풀어지고 탕색은 갈홍색으로 농도가 짙어지면서 차를 우려마시는 느낌이 들게끔 만들었다. 마셔보았다. 이전에 나온 티백과는 전혀 다른 컨셉이다.

사람들은 강의장에서나 공공 장소에서 차를 낸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인 아닌데 이 종이컵은 물을 부어마시면 되는 것이다. 차를 다 마시고나면 그냥 버리면 된다. 기발한 아이디어 상품이다. 대만은 그만큼 음료의 비중이 많은 지역이기에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는 것도 부럽지만, 이 티백 컵의 발상이 우리나라에서 나타난다면 상품화가 참 더뎠을 듯한 생각이 든다.

2009년 7월 17일 금요일

유치원 다도 교육 현장

교육은 무서운 것이다. 유치원생이 무엇을 알랴 하겠지만, 유치원에서 배운 것은 평생 몸에 지닐 수 있는 습관으로 남게 된다. 누군가 말했듯이 버릇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그 사람의 운명이 된다 하였다.

어린 아이들이 한 번 손에 쥔 찻잔과 다관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관심, 그리고 사랑으로 커나갈 것이다. 장난꾸러기로만 보여지는 이 어린아이들이 언젠가는 의젓하게 팽주의 자리에서 집안의 가족과 손님에게 차를 내는 큰 인물이 되기를 바란다.

지난 7월 14일 문경지역 유치원 가운데 사찰에서 운영하는 룸비니 유치원에서 문경다례원 고선희 원장의 강의 현장을 보게 되었다. 한 번 교육 시간은 30분으로 첫 시간에는 6-7세 원생들이고, 그 다음으로는 4세 유아들이다.  

6세 아이들은 4명이 한 조가 되어 팽주가 차를 내고 손님으로 앉은 아이들은 그 역할에 충실하고자하는 면을 볼 수 있었다. 고선희 원장의 말에 귀기울이는 모습이 대견스럽기도 하며 선생님의 설명이 그들에게는 꼭 [다도수업, 담임선생은 보조역할, 사진왼쪽]                    지켜야 한다는 것 처럼 보였다.

다도 시간은 처음부터 엄격하게 느껴저서 인지, 많은 아이들이 엄숙한 수업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드리는 것이다. 각 반의 담임은 수업의 연장선상에서 원생들을 하나하나 지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오른쪽 두번째 고선희 원장]

 [사진, 4명이 한 조로서 팽주는 차를 내고 같이 마신 뒤에 다식을 먹는다]

 

 

2009년 7월 15일 수요일

홍차를 만나는 여행

우리나라는 1990년대 후반까지도 홍차를 즐기는 인구가 많지 않아서 유럽의 다양한 형태의 홍차가 수입은 되었지만, 고급 홍차를 수입하는 곳이 드물었다. 수입을 하였다고 해도 유통이 원할하지 못해 고급홍차 수입은 일시적인 현상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은 편이다.

그런데 최근, 유럽식 홍차 마시는 인구가 급속히 늘어가는 것 같다. 나는 중국 홍차를 즐기는 사람으로서 유럽의 홍차 맛에 감동하지 않는 편이라고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일반적으로 홍차를 즐기는 분들은 유럽홍차가 멋있고, 더 우아한 다기를 다루는 것에 크게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나는 중국 홍차 메니아라서 그런지 몰라도 그런 것에 아직은 감동을 받지 못한 편이다. 최근 홍차와 관련한 논문이 자주 나오고, 차관련 세미나에서도 홍차관련 논문이 발표되고 있는 것을 보면 유럽 홍차를 즐기고자 하는 메니아 층이 늘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전되기르 바라는 입장이다.

전국에서 규모있는 서점에 가면 차와 커피, 커피와 차, 와인과 차, 커피와 다도 코너를 업장마다 제목만 다르지 비슷하게 다루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차에 관한 책이 늘어가면서 서울에 있는 대형서점에서는 특설 코너를 만들었지만 계속해서 커피코너 책이 넘쳐나서 차 쪽으로 침범하고 있는 것을 차의 책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단박에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만큼 차 보다는 커피 인구가 더 많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차에 관한 책이라고 해도 우리나라 녹차 보다는 중국차 그중에서도 보이차에 관한 책이 일시적이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지속적으로 나왔다. 그것이 대중적으로 보였다면 홍차에 관한 책은 너무 빈약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출간된 <홍차를 만나는 여행> 형설라이프, 서지은 저자의 책을 보면 과거에 나온 홍차와 관련된 책과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구성이 되었다. 역사성과 현실성을 동시에 알 수 있도록 되었으며, 팁을 만들어 초보자가 알고자 하는 부분이 쉽게 설명되어 유럽 홍차를 이해하기에 좋은 구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홍차의 원류인 중국 홍차에 관해서는 크게 언급되지 않거나 중국차를 언급한 부분에서는 저자의 전공이 유럽 차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차의 등급이나 분류는 이해하기 쉽게 정리되어 홍차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현재백석예술대학 외식산업학부 교수이며, 차와 커피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책의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홍차의 발전 - 홍차 탄생의 배경, 유럽에 수출된 홍차, 홍차의 영국 전파, 미국의 보스턴 차 사건, 차를 계기로 시작된 아편전쟁, 쾌속 범선들의 차 운반 경쟁, 대영제국의 홍차 탄생
홍차의 제다 과정 - 전통방식, Orthodox, 로터반 방식, Semi Orthodox, CTC(Crush Tear Curl) 방식
홍차의 등급 - 홀 리프(Whole leaf) 타입, 브로큰(Broken) 타입, 그 외 등급
홍차의 분류 - 산지별 분류, 스트레이트 티, 블렌드(Blend)에 의한 분류, 가향(Flavored)에 의한 분류, 티타임에 의한 분류
홍차의 꽃, 다구의 선택 - 티포트(Tea pot), 티 컵(Tea cup), 스트레이너(Strainer), 메저 스푼(Measure spoon), 티코지(Tea cozy)와 티워머(Tea warmer), 타이머와 모래시계, 티캐디(Tea caddy) 그 외 도구들
홍차 음료 - 사과홍차(Apple Tea), 딸기홍차(Strawberry Tea), 티 펀치(Tea Punch), 키위 아이스 티(Iced Kiwi Tea)


 

2009년 7월 10일 금요일

태국, 생강 소스를 얹어 발효시켜 먹는 차(miang)

태국에는 미앙(miang)이라는 차가 있나봅니다. 타이사람들은 miang nam wan이라는 음식을 대접하는데, 달콤한 생강 소스를 얹은 발효시킨 잎들을 쟁반에 놓고 참기름이랑 소금을 뿌리고 설탕 입힌 저민 생강으로 묵여있는 것으로 서양음식의 관점으로보면 현재적 퓨전음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Beyond the simple plug of miang, there are elaborate culinary presentations. Thais serve miang nam wan, an attractively plated presentation of fermented tea leaves topped with sweet ginger sauce. The miang leaves are

arrayed on a plate, drizzled with raw sesame oil, dusted with fine sea salt and laced with sugared ginger julienne. From the perspective of a Western foodie, this could be a modern fusion dish.

 

 

 

 

 

   http://www.teacoffeeasia.com/news.asp?id=870

2009년 7월 7일 화요일

한국인의 찻자리에 저작권이 있는가?

우리나라의 근대 차역사라고 하면 해방 이후 1960년부터 도시에서 차생활을 즐겼다고 해도 49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것뿐이다. 일본에 비해 차에 관해서 내세울 게 없는 것은 차와 그 문화에 대해서 단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록되고 전해진 역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찻자리의 유형을 가지고 차를 어떤 방법으로 무슨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여 손님께 낸다고 하는 규범적인 사례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아름다운 찻자리’라고 하여, 각 단체에서 두리차회라는 명목으로 다양한 찻자리가 연출되고 있다. 그리고 실내의 큰 행사장에서는 지역에서 찻자리 심사와 행다법을 시연하는 사례를 흔하게 목격하게 된다. 그만큼 행다법이나 연출된 찻자리를 발표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흥미도 유발하면서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많아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예전에 한 번 해보고 싶은 행다법이 발표되고 찻자리에서 사용되는 도구도 직물을 이용하는 것에 관심은 가졌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 차인들은 누군가의 행위를 보고 자신도 유사하게 해보게 된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먼저 발표한 사람이 저작권 운운하는 일이 생긴다고 한다. 같은 색깔의 방석도 만들어주지 못하게 하거나 처음 주문한 사람의 것 말고는 해주면 안 된다고 하는 말도 듣게 된다. 바느질 하는 사람들은 이러저런 이유로 좋은 찻자리에 기품 있게 등장하여 잘 사용되어 수요가 많아지면 좋은 일이다. 그것이 특정인에게만 사용되어야 하는 논리는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김순진 계명차문화 연구소 소장, 바닦에 다포를 크게 깔고 사용한다]

우리나라는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찻상의 규정도 없었고, 입식이 아닌 좌식일 때, 어떤 상을 차리고 다식과, 찻잔의 규격이 규범적으로 나온 것이 없다. 옛날 선비들이 바닥에서 직물을 깔고 술이나 차를 마시는 경우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바닥에 자리를 깔더라도 반드시 상에 술이나 차를 차리고 마셨다. 방바닥이나 마룻바닥에 직물을 깔고 연출하여 차를 내는 것은 이웃 나라 일본에서 전차도 다법 발표장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며, 대만에서는 현대에 와서 직물을 이용한 행다법이 가장 먼저 시행된 나라이기도 한다.

중국은 탁자를 이용한 찻자리가 대부분이라면 대만에서는 바닥에 다포와 유사한 형식이지만 규격이 다양화되어 그날 차를 내는 장소나 손님에 따라 변화를 주는 아주 재미있는 자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직물의 염색 방식도 다종다양하다. 작은 다포의 경우는 무아차회의 역사가 깊어지면서 더욱 발전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다포 색깔과 같은 것으로 차를 내면 안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정로다례원 임미숙 원장의 행다법 발표전, 쪽염으로 염색한 다포에 먼저 향을 피움]

한국에서 누군가 찻자리에 대한 가장 트렌디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국 찻자리의 중심에서 조용히 자신만의 아우라를 펼질 때, 그것이 많은 한국인의 감정의 문을 두드리고 한국인의 정서가 담겨있다면 모두 그를 따를 것이다. 아직은 행위만 보여지는 것이 전국에서 대두되다 보니까 단순히 누가 먼저 했다는 원조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일본과 대만의 다양한 찻자리를 먼저 본 사람이 한국 고유의 색을 응용한 천연염색으로 미적인 감각을 돋보이게 하여 자신의 대단한 창작품인 것 같이 말하는 것을 보고, 일본의 전차도 선생이나 대만의 차선생들이 보면 ‘수고하셨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한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의 무엇을 보여 주려고 우리와 비슷한 방법으로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한국적인 요소가 없는 상황에서 옷만 한복을 입었다고 그들이 한국적인 다법을 보았다고 하지는 않는다. 아직은 반복된 학습으로 지속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한 번 발표하고 저작권 운운하면서 일본과 대만 차인들에게 더 이상 웃음거리를 주지 않았으면 한다.

 

2009년 7월 4일 토요일

녹차, 구증구포의 실체

한양대 정민 교수님의 한국한문학 홈페이지<다산의 떡차론과 구증구포설>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이 글을 옮겨오게 된 이유는 이 시대의 차 제조법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한데, 현장이나 차관련 학자들은 구증구포에 대한 이해를 잘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 정민 교수의 글에 공감하여 구증구포에 관련된 글의 전문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차 공부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차 만든다고 모두 떡차 만들고 있습니다. 차의글로벌을 이야기하면서 제법은 후퇴하고 있습니다. 지금 마실 수있는 좋은 차가 필요합니다 http://jungmin.hanyang.ac.kr/

 

구증구포(九蒸九曝)의 실체 

다산의 제다법과 관련해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구증구포(九蒸九曝)의 실체는 무엇일까? 구증구포는 오늘날 다산의 권위를 등에 업고 하나의 신화가 된 듯하다. 다산은 앞서 본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증구포를 줄여 삼증삼쇄(三蒸三曬)로 말했다. 그렇다면 다산이 만년에 주장을 바꾼 것인가? 이 문제는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구증구포란 말 그대로 아홉 번 쪄서 아홉 번 말린다는 말이다. 구증구포는 인삼이나 숙지황 등 한약재의 강한 성질을 누그러뜨려 약성을 발휘시키기 위해 쓰는 방법이다. 이를 차에다 적용하는 것은 중국에서도 달리 예를 찾기 힘들다. 다산의 구증구포나 삼증삼쇄는 덖음 녹차가 아닌, 곱게 빻아 가루를 내 돌샘물로 반죽해 빚는 떡차에 해당하는 제법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덖음 녹차를 만들면서 다산의 이 구증구포를 적용하고, 이를 마치 절대의 비전(秘傳)인 양 떠받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째서 다산은 그 여린 찻잎을 아홉 번이나 쪄서 말려 차를 법제해야 한다고 했을까? 구증구포에 대한 다산의 최초 언급은 「범석호의 병오서회(丙午書懷) 10수를 차운하여 송옹(淞翁)에게 부치다(次韻范石湖丙午書懷十首簡寄淞翁)」란 시의 둘째 수에 나온다.


小雨庭菭漲綠衣 보슬비가 뜨락 이끼 초록옷에 넘치길래

任敎孱婢日高炊 느지막이 밥 하라고 여종에게 얘기했지.

懶拋書冊呼兒數 게을러져 책을 덮고 자주 아일 부르고

病却巾衫引客遲 병으로 의관 벗어 손님 맞이 더뎌진다.

洩過茶經九蒸曝 지나침을 덜려고 차는 구증구포 거치고

厭煩雞畜一雄雌 번다함을 싫어해 닭은 한 쌍만 기른다네.

田園雜話多卑瑣 시골의 잡담이야 자질구레한 것 많아

漸閣唐詩學宋詩 당시(唐詩) 점차 물려두고 송시를 배우노라.


1구의 ‘녹의(綠衣)’는 마당에 깔린 이끼다. 아침부터 조찰이 내린 비로 뜨락의 이끼 옷이 자박자박 젖었다. 오늘 같은 날은 마냥 게으름을 부리고 싶다. 갑자기 책을 덮으니 무료하다. 공연히 이래라 저래라 아이를 불러 심부름을 시킨다. 의관을 풀어헤친 채 지내다 갑자기 손님이 오면 허둥지둥 의관을 정제하느라 손님맞이가 늦어진다.

5구에 구증구포가 나온다. 직역을 하면 “지나침을 줄이려고 차는 구증구포를 거친다”는 말이다. ‘설과(洩過)’는 『좌전(左傳)』에 “부족함을 건져서 지나침을 줄인다. 濟其不足, 以洩其過”란 표현이 있는데서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차의 성질이 지나치게 강한 것을 감쇄시키려고 구증구포, 즉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과정을 거친[經]다고 했다. 6구에서는 조촐한 살림이라 닭도 두 마리만 기른다는 이야기를 대구로 얹고, 쓸데없는 잡담에 마음 쓰지 않고, 지금까지 보던 당시를 접어두고 송시를 더 읽겠노라는 다짐을 적었다.

차를 법제할 때 구증구포 하는 이유를 ‘설과(洩過)’에 둔 것이 흥미롭다. 지나치게 강한 차의 성질을 감쇄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한 것이다. 다산의 구증구포설은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 가운데 「호남사종(湖南四種)」이란 항목에 한 번 더 나온다.


강진 보림사의 죽전차(竹田茶)는 열수 정약용이 얻었다. 절의 승려들에게 구증구포의 방법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 품질이 보이차에 밑돌지 않는다. 곡우 전에 딴 것을 더욱 귀하게 치니, 이를 일러 우전차(雨前茶)라 해도 괜찮다.

康津寶林寺竹田茶, 丁洌水若鏞得之. 敎寺僧以九蒸九曝之法. 其品不下普洱茶. 而穀雨前所採尤貴. 謂之以雨前茶可也.


중요한 기록이다. 보림사의 죽전차를 처음 개발한 사람이 정약용이라고 밝혔다. 다산이 보림사에 갔다가 절 둘레의 야생차를 보고, 구증구포의 방식으로 차를 법제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그 품질도 중국의 보이차만 못지않다고 했다. 곡우 전에 딴 것을 더욱 귀하게 쳤다는 것은 앞서 다산이 백운동에 보낸 편지에서 곡우 때가 되었으니 서둘러 따서 떡차를 만들어 보내달라고 한 언급과 일치한다.


구증구포 떡차인 보림사 죽로차

이유원은 「호남사종」외에도 문집인 『가오고략(嘉梧藁略)』에 「죽로차(竹露茶)」란 장시를 지어 보림사 차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기록을 남겼다. 여기서도 다산의 구증구포설은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뿐만 아니라, 차의 법제 과정 및 차 맛까지 자세히 적었다.


普林寺在康津縣 보림사는 강진 고을 자리 잡고 있으니

縣屬湖南貢楛箭 호남 속한 고을이라 싸릿대가 공물일세.

寺傍有田田有竹 절 옆에는 밭이 있고 밭에는 대가 있어

竹間生草露華濺 대숲 사이 차가 자라 이슬에 젖는다오.

世人眼眵尋常視 세상 사람 안목 없어 심드렁이 보는지라

年年春到任蒨蒨 해마다 봄이 오면 제멋대로 우거지네.

何來博物丁洌水 어쩌다 온 해박한 정열수(丁洌水) 선생께서

敎他寺僧芽針選 절 중에게 가르쳐서 바늘 싹을 골랐다네.

千莖種種交織髮 천 가닥 가지마다 머리카락 엇 짜인듯

一掬團團縈細線 한 줌 쥐면 웅큼마다 가는 줄이 엉켰구나.

蒸九曝九按古法 구증구포 옛 법 따라 안배하여 법제하니

銅甑竹篩替相碾 구리 시루 대소쿠리 번갈아서 방아 찧네.

天竺佛尊肉九淨 천축국 부처님은 아홉 번 정히 몸 씻었고

天台仙姑丹九煉 천태산 마고선녀 아홉 번 단약을 단련했지.

筐之筥之籤紙貼 대오리 소쿠리에 종이 표지 붙이니

雨前標題殊品擅 ‘우전(雨前)’이란 표제에다 품질조차 으뜸일세.

將軍戟門王孫家 장군의 창 세운 문, 왕손의 집안에서

異香繽紛凝寢讌 기이한 향 어지러이 잔치 자리 엉긴 듯 해.

誰說丁翁洗其髓 뉘 말했나 정옹(丁翁)이 골수를 씻어냄을

但見竹露山寺薦 산사에서 죽로차를 바치는 것 다만 보네.

湖南希寶稱四種 호남 땅 귀한 보물 네 종류를 일컫나니

阮髥識鑑當世彦 완당 노인 감식안은 당세에 으뜸일세.

海橽耽䔉檳樃葉 해남 생달(栍橽), 제주 수선(水仙), 빈랑(檳榔) 잎 황차(黃茶)러니

與之相埓無貴賤 더불어 서로 겨뤄 귀천을 못 가르리.

草衣上人齎以送 초의 스님 가져와서 선물로 드리니

山房緘字尊養硯 산방에서 봉한 편지 양연(養硯) 댁에 놓였었지.

我曾眇少從老長 내 일찍이 어려서 어른들을 좇을 적에

波分一椀意眷眷 은혜로이 한잔 마셔 마음이 애틋했네.

後遊完山求不得 훗날 전주 놀러가서 구해도 얻지 못해

幾載林下留餘戀 여러 해를 임하(林下)에서 남은 미련 있었다네.

鏡釋忽投一包裹 고경(古鏡) 스님 홀연히 차 한 봉지 던져주니

圓非蔗餹餠非茜 둥글지만 엿 아니요, 떡인데도 붉지 않네.

貫之以索疊而疊 끈에다 이를 꿰어 꾸러미로 포개니

纍纍薄薄百十片 주렁주렁 달린 것이 일백 열 조각일세.

岸幘褰袖快開函 두건 벗고 소매 걷어 서둘러 함을 열자

床前散落曾所眄 상 앞에 흩어진 것 예전 본 그것일세.

石鼎撑煮新汲水 돌솥에 끓이려고 새로 물을 길어오고

立命童竪促火扇 더벅머리 아이 시켜 불 부채를 재촉했지.

百沸千沸蟹眼湧 백 번 천 번 끊고 나자 해안(蟹眼)이 솟구치고

一點二點雀舌揀 한 점 두 점 작설(雀舌)이 풀어져 보이누나.

胸膈淸爽齒根甘 막힌 가슴 뻥 뚫리고 잇뿌리가 달콤하니

知心友人恨不遍 마음 아는 벗님네가 많지 않음 안타깝다.

山谷詩送坡老歸 황산곡(黃山谷)은 차시(茶詩) 지어 동파 노인 전송하니

未聞普茶一盞餞 보림사 한잔 차로 전별했단 말 못 들었네.

鴻漸經爲瓷人沽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은 도공(陶公)이 팔았으나

未聞普茶參入撰 보림사 차를 넣어 시 지었단 말 못 들었네.

瀋肆普茶價最高 심양 시장 보이차(普洱茶)는 그 값이 가장 비싸

一封換取一疋絹 한 봉지에 비단 한 필 맞바꿔야 산다 하지.

薊北酪漿魚汁腴 계주(薊州) 북쪽 낙장(酪漿)과 기름진 어즙(魚汁)은

呼茗爲奴俱供膳 차를 일러 종을 삼고 함께 차려 권한다네.

最是海左普林寺 가장 좋긴 우리나라 전라도의 보림사니

雲脚不憂聚乳面 운각(雲脚)에 유면(乳面)이 모여듦 걱정 없네.

除煩去膩世固不可無 번열(煩熱)과 기름기 없애 세상에 꼭 필요하니

我産自足彼不羨 보림차면 충분하여 보이차가 안 부럽다.


죽로차는 앞서 「호남사종」에서 말한 보림사 죽전차(竹田茶)의 다른 이름이다. 보림사 대밭에 차가 많이 자라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게 차인 줄도 모르고 잡풀 보듯 한다고 했다. 그것을 다산이 와서 보고 절의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어 비로소 보림사 죽전차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곡우 이전의 일창일기(一槍一旗)의 여린 잎만 골라 딴 것을 구리 시루로 찌고 대소쿠리로 말려 구증구포를 거쳤다. ‘아침(芽針)’만을 골라 뭉쳐 쥐면 마치 머리카락이 엇짜인듯 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다산처럼 방아를 찧어 가루로 만든 것은 아니다. 한 점 두 점 작설이 풀어져 보인다고 한 데서, 구증구포한 일창일기 여린 찻잎을 쪄낸 후 그대로 뭉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유원이 마신 보림사의 죽로차는 대나무 발로 짠 작은 그릇에 담아 ‘우전’이란 상표까지 붙인 최고급의 떡차였다.


이유원은 젊은 시절 자하 신위의 집에서 초의가 자하에게 선물로 준 보림사 죽로차를 마신 적이 있었다. 그 후 백방으로 그 차를 구했으나 다시는 마셔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고경 스님이 찾아와 차 한 봉지를 선물하였다. 둥근 떡을 실로 꿰어 꾸러미로 만들었는데, 세어 보니 떡차가 110개였다. 차를 마신 소감은 막힌 가슴이 뻥 뚫리고 잇뿌리에 단맛이 감돌더라고 했다. 효능은 번열과 기름기를 제거해준다고 적었다. 이유원은 『임하필기』에서 중국의 보이차에 대해서도 자세한 언급을 남긴 바 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마셔본 결과 보림사의 죽로차가 결코 중국의 고급 보이차에 못지 않은 품질을 지녔다고 단언하였다. 그래서 그 맛을 기려 후대의 증언을 위해 보림사의 죽로차를 기록으로 남긴다고 했다.


증쇄를 거듭할수록 차의 독성이 눅는다. 냉한 성질이 따습게 변한다. 향과 맛이 부드러워진다. 다산은 이러한 약리를 잘 알았다. 이러한 제다법은 확실히 약용으로 차를 음용하던 습관에서 나온 것이다. 위 시를 통해 이유원이 「호남사종」에서 말한 구증구포로 법제한 보림사의 죽전차, 또는 죽로차는 잎차 아닌 떡차임이 더 확실해졌다. 또 다산이 처음 제다법을 알려주었다는 보림사 죽로차를 초의가 그 방식대로 만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초의차 또한 다산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로 이어진 떡차 제법

보림사의 구증구포 죽로차가 떡차였다는 사실은 조선의 차에 관심이 많았던 모로오까 다모쓰(諸岡 存, 1879-1946)와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 1900-1982)가 1938년 전남 나주군 다도면 불회사와 장흥 보림사 등을 직접 답사하여 조사한 결과와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답사기에 수록된 불회사의 전차[磚茶] 제다방법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차를 만드는 기본은 순을 딴 뒤의 남은 잎을 채취해서 이것을 하루 안에 3,4회 찐(찐 것을 방안에 얇게 펴서 식히는 정도로 하여 찌며, 찌는 횟수가 많을수록 향기와 맛이 좋다) 것을 절구에 넣고 끈적끈적하게 충분히 찧은 뒤, 지름 아홉 푼(약 2.3cm), 두께 두 푼(약 0.5cm)이 되게 손으로 눌러 덩어리 모양으로 굳히고, 이 복판의 작은 구멍에 새끼를 꿰어서 그늘에 말리며 될 수 있는 대로 짧은 기간에 만들어 사용한다.


몇 번을 찌든 차 잎을 딴 그날 낮과 밤 안에 여러 번을 찌는데, 찌는 횟수가 많을수록 향기와 맛이 좋아진다고 언급한 사실이 흥미롭다. 또한 완전히 건조시키지 않고, 찐 것을 방안에 얇게 펴서 뜨거운 기운을 식히는 정도로만 말린다. 이렇게 여러 번 찌고 말리는 일을 반복하는 이유는 향과 맛을 더 좋게 하기 위해서다. 여러 차례 찌고 말리기를 되풀이한 뒤에 비로소 절구에 넣고 끈적끈적해질 때까지 찧는다. 찌는 회수를 3,4회 정도라고 했는데, 앞서 본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다산의 떡차 제조법과 한 치의 차이가 없다. 또 당시 보고서에는 보림사의 청태전(靑苔錢) 제조 방법도 보인다.


이(보림사) 부근에서는 청태전을 보통 차라고 하여, 1919년경까지 부락 사람들이 만들었으나, 그 뒤 작설차(雀舌茶)를 마시게 되면서 만들지 않는다. (중략) 가져온 날잎차는 곧장 가마에 넣고 쪄서 잎이 연하게 되면 잎을 꺼내(찻잎이 누런 빛깔을 띨 무렵) 절구에 넣고 손공이로 찧는다. 찧을 때는 떡을 만드는 것처럼 잘 찧는다. 이때 물기가 많으면 펴서 조금 말리고, 굳히기에 알맞게 되었을 무렵, 두꺼운 널빤지 위에서 내경 두 치(6cm), 두께 5리(0.15cm), 높이 1푼 6리(0.48cm) 가량의 대나무 테에 될 수 있는 대로 짜임새가 촘촘한 얇은 천(무명)을 물에 적셔서 손으로 잘 짜서 펴고, 그 안에 찧은 차를 넣고, 가볍고 평평하게 엄지 손가락으로 눌러 붙인다. 그것이 조금 굳어갈 때에 꺼내서 자리 위 또는 평평한 대바구니 위에 얹고 햇볕에 쬐어 절반쯤 말랐을 무렵에 대곶이로 복판에 구멍을 뚫는다. 잘 마른 다음 곶이를 꿰면 차가 부서지므로, 연할 때에 하나씩 꿴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그 날 안에 말리도록 한다.


찐 차 잎을 절구에 찧고 말리는 과정 또한 다산의 방법과 같다. 대나무 통을 얇게 잘라 차 잎을 담을 틀을 만들고, 거기에 찧은 차를 눌러 담아 말렸다. 당시 보고서에는 50년도 더 된 청태전이 이 마을의 집에서 발견되었다는 언급도 있다. 다산 이래로 초의가 만들고 이유원이 마셨던 죽로차를 거쳐, 보림사 인근에서 생산된 청태전, 즉 떡차는 지속적으로 생산되었던 셈이다.


다산은 구증구포가 차의 강한 성질을 감쇄시키기 위함이라고 했고, 위 글에서는 차의 향과 맛을 더 좋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증포를 거듭하면 강한 성질이 감쇄되면서 향과 맛이 순하고 부드러워진다. 이유원은 위 시에서 차를 마시자 막힌 가슴이 뻥 뚫리고 잇뿌리에 단맛이 감돌더라고 해서 이를 뒷받침했다.

구증구포는 여러 차례 되풀이한다는 의미이지, 꼭 숫자를 세어 아홉 번 하란 말이 아니다. 9는 만수(滿數)이므로, 여러 번의 뜻으로 흔히 쓴다. 이렇게 본다면 다산이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서 ‘삼증삼쇄(三蒸三曬)’로 횟수를 줄여 말한 것도 이해가 된다. 다산이 말한 구증구포는 꼭 숫자를 헤아려 아홉 번을 말한 것은 아니었고, 3회 이상 여러 차례 찌고 말리는 과정을 되풀이 한다는 의미로 보아 무리가 없겠다. 즉 다산이 만년에 횟수를 줄이는 쪽으로 견해를 수정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를 오늘날의 구증구포설처럼 교조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다산이 직접 말한 증거가 나왔으니 구증구포는 마땅히 삼증삼쇄로 바뀌어야 옳다. 하지만 찌는 횟수가 몇 번이냐는 큰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이때 구증구포는 녹차 아닌 떡차를 전제로 한 언급이 아닌가?

이제껏 다산의 떡차론과 구증구포설을 살폈다. 다산이 통상 마신 차는 잎차 아닌 떡차였고, 구증구포로 법제한 차 또한 덖음 잎차가 아닌 떡차였다. 다산이 중국에서도 쓰지 않는 구증구포의 방법을 도입한 것은 당시 조선에서 차가 약용으로 사용된 것과 관련이 깊다. 또한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하는 당시 조선의 식습관에 비추어 녹차는 성질이 너무 강해 위장에 강한 자극을 주고, 정기를 손상시킨다. 차의 냉한 성질을 감쇄시키고 떫은 맛을 부드럽게 하며 단맛을 강화시키는데 구증구포의 제다법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으리라고 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 연구자들의 과학적인 검토가 더 필요하겠다.


필자는 이글에서 다산 선생께서 마신 차가 떡차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차도 떡차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떡차는 진공 포장이나 냉장 보관을 생각조차 할 수 없던 당시에, 잎차를 덖을 경우 장마철을 넘기기도 전에 차가 발효되어 맛이 변해 버리는 상황에서 나온 제다 방법이었다. 떡차가 잎차보다 맛이 더 좋아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시대가 다르고 기술이 발전하면 제다법도 바뀌는 것이 마땅하다.


연암 박지원은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과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을 말했다. 옛 것을 본받되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더라도 능히 법도에 맞아야 한다는 말이다. 과거의 자취를 함부로 왜곡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전통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위험하다.


2009년 7월 2일 목요일

중국, 보이차 학과 대학원 졸업생 전원 미취업

차(茶, tea)시장은 100년 만에 호경기가 한 번 온다고 한다. 그 한 번의 호황기(2004년 7월부터 2006년 7월)를 끝낸 중국 보이차 시장은 현재 침체기로 접어들고 있다. 2008년 10월 곤명의 보이차 시장에 조사를 갔을 때, 상가는 죽은 도시같이 설렁하고 암울하게 보였다. 보이생차는 가게마다 쌓여있고, 보이생차가 돈이 된다고 차 산지와 찻잎을 확인하지 않고 무지하게 투자한 사람들에게는 막대한 손실을 안겨주었다. 한국은 중국차 수입때문에 피해를 입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 중국은 현업에 종사하는 농가 뿐 아니라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7월 2일 중국 곤명에 있는 운남농업대학교 보이차 학원 보이차 학과(석사과정) 8명이 졸업한 날이다.

    곤명에 있는 보이차 전문, 대규모 상가 조성지역에서 문을 닫은 상가

오늘이 졸업식인줄 모르고 한국 유학생과 통화할 일이 있어서 전화를 하게 되었다. 보이차 전공 석사과정을 졸업한 학생 8명이 한자리 모여 낮술을 한 잔 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도 차산업 관련해서 취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황기인 2006년 보이차 전공 석사과정 졸업생은 중국돈으로 10만 위엔에서 20만 위엔(한화 2천만-4천만원)을 사회 초년생 정착금으로 지급하고 회사로 모셔갔다고 한다. 보이생차 생산 비중이 보이숙차보다 많은 시기였다. 폭발적인 보이생차 주문이 뚝 끊어진 2007년도 까지만 해도 취업은 잘 되었다고 한다. 2009년의 현실은 졸업식날 까지 보이차 산업에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은 남의 나라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졸업생 8명중 한국인 유학생은 1명이다.

참고로, 중국 운남농업대학교 보이차학과 대학원 석사, 학사 한국인 유학생은  전체 12명으로 2009년 7월 현재, 석사과정 3명(오늘 졸업한 학생 P양, 2학년 S양, 1학년 S양) 학부과정에 9명이 공부하고 있다. 이곳은 보이차를 전공하는 학생들이다.

이 뉴스와 관련있는 지난 글 2008년 10월 곤명 차시장 현황 확인 http://seoku.com/216

2009년 원광대학교 한국문화학과 예다학전공 10명 박사학위수여 http://seoku.com/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