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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28일 화요일

다미향담(5) 보이차의 정직한 맛

2007년 겨울로 기억된다. 경기도 광덕사에서 경원스님께서 내어 주신 “남인산차”라는 차를 맛보았다. 포장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비닐봉지에 담겨있는 차였다.

일반적으로 좋은 보이차라고 하면 형태가 병차로 되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산차 형태는 한 단계 아래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때 마신 ‘남인산차’는 그 이후 더 좋은 차라고 스님께서 주신 차보다도 내겐 그때의 산차 맛이 더 좋았다.

나는 모든 차(茶, tea)에서 세세하고도 오밀한 맛을 찾아서 즐길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다만 여러 가지 주변 여건으로 볼 때 바르게 만든 차를 접할 기회가 많았고, 차의 원본이라고 하는 것의 사진 작업을 하면서 차 사진의 주인들이 알려주는 외형과 맛이 기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차는 보이차에서는 생차의 경우에 한해서다. 진년보이차는 한국에서 인연에 의해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참[사진, 진년보이차 홍인 원통]                       으로 많았다.

하지만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내 입맛에 맞는 내가 찾는 맛이라는 것도 있다. 그것은 다른 이들과 현격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차를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상인이 가진 입맛도 내가 보기에는 천차만별이다. 그런 상인들의 수준의 낮고 높은 가운데 그들의 고객은 또한 얼마나 다른 입맛을 키우고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면 무서운 일일 수도 있다. 그래서 보이차를 취급하는 곳만 경제적으로 성공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맛에 대한, 차에 대한 정확한 규범이 없고 차를 잘 만든 것을 취급하는 것보다는 시류에 맞는 잘 팔리는 차를 취급하면 되기 때문이다.

2-3년 전만 해도 중국에서 차를 만들어 한국으로 판매하는 사람들을 매도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상황을 보면 그들이 더 노력하는 것을 간간히 볼 수 있다. 중국도 불경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을 실력으로 이겨나가는 사람만이 앞으로 더 크게 성장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이 한국에서 취급하는 상인들의 상술과 맞닥뜨려 위험한 경쟁이 아닌 실력과 자본의 힘이 균형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은 지난 추석 연휴로 7일간 한 곳에서 글을 쓰는 시간을 가졌다. 주변 지인들에 대한 생각들을 많이 하며 나 스스로는 그동안 사진 작업하거나 작업하고 남은 차를 마시면서 차 맛의 주관적인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근본의 맛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일주일간 아무 곳에도 가지 않고 매일 새벽4시까지 원고를 쓰면서 의흥홍차, 목책철관음, 대우령과 천량차를 만드는 모차를 복전 방식으로 만든 차, 4가지를 마시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난날 기억에 남는 차를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나는 일반적일 때는 차의 맛을 구분해서 마시지는 않는다. 잘 모르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주관적인 판단에 좋은 차는 그 순간의 차 맛을 아주 오래도록 정확하게 그 당시의 맛을 기억한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그 차 맛을 다시금 꺼내어 또 다른 차와 비교하는데 표준 또는 지표로 삼는다. 어쩌면, 그렇게 할 수 있기에 ‘다미향담’을 연재할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다미향담을 열게 된, 그 단초가 된 것은 죽천향 집에서 마신 곡강호차였다. 그래서 내겐 고마운 일이다.

며칠 전에 서울여대 ‘유아다례지도사’ 과정에서 차도구 특강을 하였다. 차도구에 대한 이야기지만 ‘소재는 소박하고 결과에는 격조가 있어야 한다’는 주제였다. 이 말에 수강하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 같다. 물론 그에 맞는 차도구를 보여주었다. 즉, 값만 비싼 것이 아니라 소박한 소재에서 기품이 넘쳐나서 값이 비싸게 보이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물을 보고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즉, 곡강호의 방위차가 고가의 생차가 아니었기에 그 맛을 기록하며 알리고 싶은 것이었다. 잘 만들고 그래서 값이 엄청 비싼 것은 누구를 위한 차인가 하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2009년 5월 대만 순인다장에서 주인은 국제적으로 고가의 차라고 정평이 나있는 ‘홍인’을 다엽관에 담겨 있는 채로 들고 나와 다호에 가득 넣고 우려 주었다. 첫 맛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주파수가 연결되는 점은 6년전 일광다장에서 그 당시 아주 흔하게 마신 홍인 맛이다. 그 때 일광다장에서는 홍인을 보통으로 마셨고, 손님에게 접대를 해온 차였다. 그 맛과 광덕사의 경원스님이 내는 홍인은 같은 맛이다. 최소한 일광다장의 홍인 맛과 경원스님의 홍인 맛, 태허스님으로부터 마신 홍인, 대구 박창식 선생의 죽천향실 그리고 대만 순인다장에서 마신 홍인 맛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즉 그 맛을 국내의 다른 곳에서는 그 맛을 보지 못한 차였다.

유추해 보면 같은 집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홍인의 맛은 국내 어디에서든 2007년 9월-2010년 9월 사이에는 맛을 보지 못했다. 홍인이라는 차는 마실 기회가 많았다. 왜 맛의 차이가 다른가. 논외의 문제로 둔다. 순인다장에서 마신 그 차의 맛을 지닌 차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가격의 문제이며, 소장 가치의 문제이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내는 것은 ‘다미향담’에서 다룬 곡강호에 대한 문의가 다양하게 있어서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를 말하려고 한 것이 이렇게 흘렀다. 즉, 차 맛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환경적인 요소가 있을 것이며, 팽주의 습관, 사용하는 물 등등이다. 즉 주인의 정성과 마음이 하나로 일치되어 나오는 차의 결과물이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많이 유행하는 보이생차를 대량으로 구매해서 저장하는 문제는 개인적인 일이다. 하지만 일반인의 상식을 훨씬 뛰어 넘는 아주 비싼 차가 진품 원료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런 논리는 인터넷의 활용이 확산되기 이전의 상황에서 가능할 수 있다. 지금은 다음 세대인 스마트폰 시대에 살고 있기에 이 상황에 맞는 정직한 사람들의 더 큰 활동 영역이 기대되는 시점이다. 그에 대한 상인의 노고에 좋은 결과물은, 훗날 오늘날의 그 훌륭한 차 맛을 간직하고 다담을 나눌 수 있으며, 특별한 가격이 아니었는데도 바른 차를 소장한 사람들이 기쁨을 안고 행복한 차를 마실 수 있다고 본다.

2010년 9월 3일 금요일

다미향담(1) 진실된 생차 맛을 보다

이번 2010년 여름휴가를 중국 운남성 곤명으로 가서 14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오신 대구 죽천향 박창식 선생 댁을 방문했다. 대구에 다른 일이 있어서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박선생님 댁과 가까운 곳이라 온 김에 전화를 드리게 되었지만 내심 긴 여정에 운남 지역에서의 차를 가져왔을 것 같은 은근한 기대감에서였기도 했다.

오랜만에 도착한 죽천향 차실. 박선생님은 보이 생차를 보이면서 이번 여행에서 만난 좋은 차라고 한다. 필자의 선입견에는 보이 생차라도 특별한 풍미를 느낄 수 있는 차맛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예상은 분명코 맞았고, 필자는 지금까지의 보이생차에서 느꼈던 선입견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운남 곤명의 웅달 차시장에서 "곡강다장" 이라는 가게를 열고있는 한국인 김홍길 선생이 차의 이름을 자신의 호이며 가게의 이름인 曲江을 사용하여 <곡강호>라고 하여 특별히 제작한 <방위 고수차>라 한다.  

[사진, 죽천향 차실] 이 차는 방위에서 8시간정도 더 들어가야 하는 지역에서 300 - 500년 정도의 고수차들이 있는 원시림속 다원의 찻잎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박창식 선생님이 이번 여행에서 차맛을 여러번 시음하고 현지에서 구입했다고 한다. 필자는 그 첫 차의 맛을 보기에 앞서 향기가 여느 보이생차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맛이었다. 차를 마시고 잔에서 베어 나오는 향은 잔을 탁자에 내려놓지 못하고 자꾸 코 끝으로 가져가서 깊은 향기를 맡게 되었다.

생차라고 하는데 이런 깊고 풍부한 오미를 느끼는 차를 만나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올해 생차......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생차 중에 고차수로서 5년, 10년생이 되었다고 하는 차나무에서 채취한 찻잎들로 이루어진 보이 생차에서 맛볼 수 있다는 그러한 오미가 이렇게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이 보이 생차는 야생차밭에서 채취한 것으로 그러한 고수차의 개념과도 동떨어진 것이었고, 결국 이 생차는 우연한 만남 속에 양심적인 자세로 만들어 낸 상급의 보이생차였던 것이다. 보이차라고 다 같은 보이차가 아니듯이 보이차의 시작은 생차를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에 달려 있다. 그 생차는 바로 지금 만들어진 보이차편으로 그 차편이 앞으로 10년이 지나게 되면 10년생 청병으로 다시금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차의 가장 기본은 찻잎 자체가 좋은 것을 사용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차편들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마치 유명한 와인처럼 그 숙성도를 더해나가는 것이다. 차를 만들 당시에 원재료인 찻잎에서 질이 떨어지고 보관도 흐트러진 보이를 만난다면 아무리 햇수를 더해도 그 차는 보이로서의 생명력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만난 보이생차는 진실로 다음세대까지 남겨주고픈 욕심이 들 만큼의 생차였다.

그 다음 보이 숙차를 꺼내었다. 이 또한 이번 여행에서 구한 것으로 맹해차창의 발효연구실에서 20년 근무한 연구원이 독립하여 금년에 만든  숙차라 한다. 이 차를 마실 때 윗 층에 사시는 정춘복 선생님이 오셨다. 이미 이집의 안주인인 이정미 선생의 전화를 받고 내려오셨지만 그 분과 이 집 부부는 과거에는 이런 숙차는 마시지 않았기에 의아해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난 세월 중국 보이차 생산공장에서 잘 만든 보이 숙차의 맛과 가치를 조금알고 있기에 기대를 하면서 마셨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숙내는 전혀 나지 않았다. 부드럽고 목넘김도 좋았다.

이제 차꾼들이 해외에서 구입해 오는 차들이 재각각의 인연으로 만나서 시음하고 선택해서 가져오는 차들에서 보이숙차라고 무시할 내용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좋은 청병을 마시는 차꾼은 웃을지 모르지만 차 값의 대중성과 가격비교에서 볼 때는 다르다) 다음엔 천량차를 마시게 되었는데 차 맛을 보시고 위층에서 오신 정춘복 선생은 이 차는 천량차에서 바깥쪽의 맛이 라고 하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

천량차는 그 두께가 상당하기에 바깥쪽의 세월과 안쪽의 세월이 엄연히 다르다. 때문에 바깥쪽의 맛과 속내의 맛을 아는 사람은 이미 천량차의 끝까지 맛을 본 사람이다. 이 차는 그 선생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라 했지만 좋은 천량차를 쪼개어 마시는 시간과 세월에서 부위별 맛을 아는 것은 그야말로 경륜이 아닐까?

이날 세 종류의 차를 마시고 나왔지만 유독 보이생차 맛이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을 보면, 이제는 보이차에서 맛이 좋은 차를 골동보이차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비싸지 않으면서도 좋은 차를 즐길 수 있는 것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1년, 2년 뒤에는 어떤 맛으로 다가올지 모르지만 이번에 마신 <방위고수차>는 그야말로 오랜만에 만난 차 중에서도 일품이었다.

2009년 9월 2일 수요일

골동보이차의 왕자 - 홍인의 진실

보이차에 대한 담론은 앞으로 더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지금까지 나온 것만 보아도 더 이상의 특별한 모범 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자료는 나올만큼 나왔다. 여기서 기존의 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제시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나는 보이차에 대한 자료적인 접근에 가능한 사람은 중국인으로서 전문 차학자이거나 언론만이 가능하리라 보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도 대만과 홍콩의 차시장에서 거래되는 차를 구매해서 마셔보지 않았다면 현실과는 [사진, 대만 보이차 전문점에서 차를 내는 모습] 동떨어진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실제 홍인을 차의 수준별로 비교해서 마셔본 사람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동급의 다른 차들도 다양하게 비교해서 마셔본 사람과의 대화는 같을 수가 없다.

즉 흔히 골동보이차에 대해서는 죽천향실 블로그를 운영하는 박창식 선생님의 의견을 믿고 있다. 위에 말한 인급, 호급의 모든 차들을 비교해서 마셔본 사람이고, 늘 중국의 실제 동향을 관찰하면서 우리들에게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그의 블로그에 여러사람의 글을 비교해서 올려진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바르게 인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석우여담에 올려본다.

아래 글의 원본 보기 http://blog.daum.net/36254598『푸얼차(普洱茶)』의 저자인 ㄷ교수의 설명. “찻잎 원료의 산지를 구별하기 위해 맹랍(勐臘)지방의 찻잎으로 만들어진 푸얼차의 차자(茶字)는 붉은 색으로 표기하여 ‘홍인(紅印)’이라 했고, 맹해(勐海)부근에서 구입한 찻잎으로 만든 푸얼차의 차자(茶字)는 푸른색으로 인쇄하여 이를 ‘녹인(綠印)’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붉은 차자(茶字)의 푸얼원차(普洱圓茶)는 맹랍의 제일 좋은 찻잎으로 만들어졌고 이무진(易武鎭)은 맹랍현(勐臘縣)에 속해있기에 붉은 색으로 찍힌 차자(茶字)의 찻잎은 가장 좋은 찻잎으로 인정받은 이무차산(易武茶山)의 대엽종 차나무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을 곁들여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홍인푸얼원차(紅印普洱圓茶)는 40년대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1942~1949)에서 생산된 조기홍인과50년대 공산당정권(共産黨政權) 아래서 생산된 후기홍인제품으로 나누어진다. 40년대의 조기홍인은 이무차산(易武茶山)에서 생산된 최고품질의 대엽종 찻잎으로 만들어졌기에 품질이 우수한 반면 후기홍인 제품은 50년대 공산정권 아래서 제조한 것으로 품질면에서 조기보다 많이 떨어진다.”고 홍인에 대한 판별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짱유화 교수의 인급차(홍인)에 대한 이야기 - 홍인에 대한 의혹 풀이는 먼저 제작연대부터 시작해야할 것 같다. 1950년대, 내란을 겪은 후의 중국은 전쟁의 피폐함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효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우리가 언급하고자 하는 맹해 지역은 중국의 변방이기에 그 참상은 더욱 심했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의 맹해의 물품거래는 현금이 아닌 물물교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이곳에서의 화폐는 가치가 없으며 돈이란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다. :당시 불해차창(佛海茶廠) 즉 지금의

맹해차창(勐海茶廠) 복원(復原)에 참여했던 탕렌량(湯仁良) 선생의 인터뷰 “1949년 중국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정부가 이곳에서 철수한 후 맹해는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맹해차창의 경우 생산설비들이 모두 도난 또는 파괴가 되어 차 생산은 물론 기초 작업마저 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되었다. 당시 우리는 맹해차창의 복원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오직 차창(茶廠) 작업장의 복원에만 매진을 했다”

그리고 그는 당시 맹해의 현황에 대해 “당시 맹해의 인구 구성원을 보면 소수민족이99%이며 이곳의 한족은 모두 외지에서 파견된 공무원들뿐이다. 소수민족들의 삶의 방식을 보면 자신들이 생산하는 물건으로 서로 교환하면서 생활하는데, 당시는 무척 빈곤했던 터라 모두들 곡물을 시장에 내놓아 교환할 처지이지 차를 만들어 내다 파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설사 있었더라도 그 양은 아주 미미했을 것이다.”

필자는 여러 번 맹해현 정부자료실을 들췄으나 당시 이곳의 차에 관한 그 어느 자료도 찾지 못했다. :현 운남성 서쌍판납 맹해현 차엽판공실 주임인 쯔엉윈룽(曾雲榮)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1951년까지 맹해는 무척 혼란하기에 차를 만들고 상품화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당시 운남성의차의제조 및 판매에 관한 유통은 모두국영형태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지시는 모두주관 부서인‘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中國茶葉公司雲南省公司)’로부터 받았다. 설령 생산이 있더라도 그것은 개인들이 만든 가정용 형태의 차일 뿐 상업제품은 아니다. 맹해차창일 경우 1953년까지는 공장의 복원에만 전념했기에 푸얼차의 생산은 없었고 1954년 이후 맹해차창의 설비가 어느 정도 구비되자 조금씩 차의 원료를 수집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맹해에는 푸얼차의 생산과 유통에 관한 정확한 일기는 갖고 있지 않다.” 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운남성의 푸얼차에 관한 모든 자료는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에 보관되고 있다. 필자는 현 중국운남성차엽협회(中國雲南省茶葉協會) 회장이신 쯔어우자쥐(鄒家駒)씨의 도움으로 당시의 자료를 찾을 수가 있었다 .운남성공사의 기록에 따르면 맹해차창은 1956년부터 푸얼차를 만들었으며 당시 출하했던 이 제품은 모두 광동성(廣東省)으로 갔는데, 이 제품이 바로 후일 ‘홍인’이라는 푸얼차다.

그럼 여기에서 나타나는 의혹은 어떠한 연유로 정식으로 등록된 녹색‘ 차(茶)’자의 마크가 붉은 색으로 인쇄되어 출하된 것이냐의 문제이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1950년대 맹해는 무척 낙후된 지역이기에 인쇄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이에 당시 맹해차창에서 출하한 모든 포장지는 가장 가까운 지역인 푸얼현(普洱縣)(보이현)에서 인쇄됐으며 이러한 작업은 6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50년대 당시 푸얼현의 인쇄는 원시형태인 목판으로 이뤄졌다. 목판인쇄(木版印刷)란 목재의 엇결이나 절단면에 그림이나 글자 따위를 볼록하게 또는 오목하게 조각한 판목에 안료를 첨가한 수성잉크를 칠하고 인쇄지를 놓고 종이 뒷면을 문질러 인쇄하는 방법이다. 인쇄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잉크를 배합하는 과정에서 색상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다. 즉 사용된 색상의 배합비율의 정확성이 바로 인쇄의 품질을 좌우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푸얼차 포장지의 인쇄는 단순한 색감 즉 붉은 색과 녹색 등 2가지 색감의 결과물에도 불구하고 포장지 전체를 붉은 색으로 인쇄했던 것은 보통 당시의 낙후된 인쇄기술로 치부하고 있으나 필자의 시각은 약간 다르다. 오늘날 인자급 푸얼차를 판별하는데 에 있어 포장지의 글씨체뿐만 아니라 인쇄된 붉은 색의 농담(濃淡)에 따라 그 명칭이 다르다. 즉 붉은 색의 진하고 엷음에 따라 도홍판(桃紅版)과 주홍판(朱紅版)로으 나뉜다. 여기서 말하는 ‘도(桃)’란 복숭아와 같은 엷은 붉은 색, ‘주(朱)’란 주사(朱砂)와 같은 짙은 붉은 색을 말하는데, 이러한 색상의 차이는 염료의 배합비율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2가지의 색상 즉 녹색과 붉은 색을 한 가지의 색으로 통일되어 인쇄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작업자의 자세에서 비롯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잘못된 포장지의 인쇄는 3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얼마가지 않아 운남성공사의 직원들에 의해 제기되면서 비로소 수면 위로 부각되었으며, 이 일로 인해 운남성공사는 맹해차창을 심하게 비판하였다. 질책을 받은 맹해차창은 푸얼현의 인쇄소에 이 문제를 제기했고 그 결과 포장지의 ‘차(茶)’자를 원안대로 녹색으로 인쇄하게 된다. 이 포장지로 출하한 제품이 바로 ‘녹인’이라는 푸얼차다. 이상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아래와 같은 답이 나온다.

홍인과 녹인의 구분은 찻잎 원료의 생산지 즉, ㄷ교수가 설명하는 것처럼 ‘홍인’은 맹랍(勐臘)지방의 찻잎으로 만들어진 푸얼차며, ‘녹인’은 맹해(勐海)부근에서 구입한 찻잎으로 만든 푸얼차 라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으며, 이러한 포장지의 차이는 단순한 인쇄상의 착오일 뿐 찻잎의 생산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리고 맹해차창에서 ‘팔중차’ 로고로 출하한 첫 번째 푸얼차의 연도는 1956년도 이다. 글. 짱유화

죽천향의 첨언: 그럼 도대체 인급차 홍인은 몇 년도부터 생산된 차인가요! 첫째, ㄷ 교수의 말대로 1942년부터 생산된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절대로, 아니다” 입니다.

그 이유는 운남성 차엽 진출구공사<云南省茶叶进出口公司志>의 기록에 따르면 “云南中国茶叶贸易公司”는 1950년 9월 이름을 “中国茶业公司云南省公司”로 개명한 바,1942년-1949년 만들어진 소위 조기홍인의 포장지에 1950년 에 바뀐 이름인“中国茶业公司云南省公司”라는 명칭이 절대로 인쇄되어 찍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짱유화 교수의 말대로 홍인은 맹해차창에서 1956년부터 생산된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인급차가 맹해차창에서 1956년 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사실은 위 여러분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맞다고 보여집니다. 그럼 인급차는 1952년부터 생산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된 것일가요 ........ 그것은 바로 맹해에서 구입한 원료를 하관으로 보내 하관차창에서 생산한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아래 중국의 인터넷 자료를 보면 현 운남성서쌍판납맹해현차엽판공실(雲南省西雙版納勐海縣茶葉辦公室) 주임인 쯔엉윈룽(曾雲榮) 선생의 증언 중에 나와 있는 “맹해차창일 경우 1953년까지는 공장의 복원에만 전념했기에 푸얼차의 생산은 없었고 1954년 이후 맹해차창의 설비가 어느 정도 구비되자 조금씩 차의 원료를 수집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씀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고자료: 중국 인터넷 자료중에서...   http://www.puertea8.com/html/259.html

2009년 2월 19일 목요일

야생 보이 생차와 적월만추

부산에서 일을 마치고 대구로 갔다. 죽천향실 블로그 운영자 박창식 선생님 댁을 방문하여. 출간예정인 <한국의 찻자리>에서, 지난 2년간 대구 <자연주의 찻자리> 10회 가운데 6회분을 다루는 일로 찾아뵈었다. 박선생님 댁의 차실의 분위기는 봄이라서인지 아니면 기분 전환으로 했는지 몰라도 찻자리는 조금 바뀌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운보연에서 만들었다고 하는 생차의 한 종류]

최근 ‘운보연’에서 제작한 순수 야생차라는 차를 시음하였는데, 우리가 흔히 야생차라고 하는 것의 외형과 맛을 두고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하지만 이 차는 잎의 크기가 조금 다른 것을 느낄 수있었다. 야생 차나무의 환경에서 찻잎을 수거한 것 같다는 느낌과 맛이 순하면서도 미묘한 맛이 동반되는 것으로 2008년 생차인데 또 다른 맛을 볼 수 있었다. 늘 박선생과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보이차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오늘 이야기가 언제가 다르게 정리될 수 있다는 전제하여 마음이 통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이 숙병의 차이름을 공모해서 만든 차인데 2008년 ‘적월만추’라는 차를 잠시 마셔보았다. 인터넷 상에서 보이차를 만들면서 이름을 공모하여 판매한다는 아이디어가 신선했다. 2008년 보이숙병에서 특별한 맛이나, 외형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케팅이 정당화되면서 공개적이라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1등, 2등, 3등 그리고 참여자에 대한 선물 등등이 상업적이면서도 재미적인 요소와 흥미를 유발한다는 것이 그 이름을 잊지 않게 만드는 결과일 수 있다. 그래서 그 차를 중국에서 만들어 수입하는 단계 등이 공개되면서 이 차를 공급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가지에 되고 동시에 나름 책임감을 가지게 된다는 기대를 해본다.

2008. 02. 18.

2007년 1월 17일 수요일

자연주의, 두 번째 찻자리 - 경창원차(1930년대)

자연주의, 두 번째 찻자리...


일시:2006년 11월 18일(토) 오후 7시 ~12시50분


참여인원: 12명


자연주의에서 주최하는 특별한 찻자리에 두 번째 참석하면서 오늘 마실 차에 대한 궁금증과 누군가 새롭게 만나게 되는 차인의 모습이 또 새롭게 인연 지어질 사람과의 만남이 어쩌면 내게는 더 기다려지는 일인지 모른다.


오후6시 30분~7시 20분: 나는 6시 30분에 도착하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 첫 번째 찻 자리에도 참석하신 Y씨가 오셨다. 지난번 찻 자리에서 품다한 홍인의 엽저를 잘 보관하여 자차한 차와 잣죽으로 가벼운 요기를 하는 가운데 “매다옹” 안재한 선생님이 경주에서 “아사가”다원을 운영하시는 김이정 씨와 경치 좋은 산골, 구름 같은 집에 정갈한 차실을 가지고 계신 오누이를 모시고 참석하셨다. “아사가”의 김이정 씨는 초면인데도 첫 느낌이 “천상 茶人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아한 기품이 들어오는 주변에 퍼지는 듯했다.


조금 뒤 한 분 두 분 오셨는데 지난번 참석자 가운데 한부부가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지만 이 자리에 참석하려고 다른 이벤트를 모두포기하고 오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경원스님과 대구 지역 J국회의원, 피아노를 조율하시는 분, 부산에서 오신 P님을 포함한 12명 전원이 참석하였다.


7시20분~8시: 인터넷 상에서 율리 라고 불리는 닉네임을 가진 부부의 결혼 22주년을 축하하는 간단한 이벤트로(케익, 샴페인으로 축하와 건배) 모듬치즈, 궁중 떡 볶기와 함께한 와인 맛보기가 먼저 진행되었다.


8시~9시: 경창원차(1930년대 경창호 60g)를 내기 전, 경원스님의 자사호 선별에서 필요한 몇 가지 주의 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일반적으로 밖에서 쉽게 들을 수 없는 수준 높은 자사호 감식안을 엿 볼 수 있었다. 많이 사용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연대별 감식에 대한 것이었는데 일반적인 사용자는 전혀 알 수 없는 진본 사용자의 귀중한 지식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격인 경창원차를 품다 할 때, 주인 박창식 씨가 차를 우리게 되었다. 손님으로 앉은 분 가운데 고수들이 많이 있으면 자세가 흔들리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도 차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차를 우려내는 것을 보면 그동안 茶人 이정미 씨의 부군으로 활동한 것이 그저 지나간 세월은 아니었다고 보여 졌다.

경창을 60g 넣고 차를 낸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경창의 맛, 그 순수한 본질의 맛을 찾아서, 그 맛을 보기 위해서 자리에 모인 12명이 한꺼번에 차를 마시며 실하고 농한 차의 맛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차를 내는 사람의 경륜의 힘도 함께 실린 맛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때 쯤에서 각자의 소감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이 차에 대해서 비슷한 수준의 다른 차와 비교해서 음다를 할 수 있는 분은 4-5명 정도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자리는 참석자들에게는 차 마시는 공부를 하는 자리다 하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보이차에 관해서 만큼은...(손에 드는 잔마다 열복이요, 순간 넘김마다 희열이니 자리함만 해도 천복인데 모자란 지식은 뒷 춤에 감출 수밖에)


9시~10시: 신작 보이차에 대한 여러 이야기와 1950년대 녹인(람인) 40g 품다

10시~11시30분: 대홍포를 포함한 암차이야기와 백엽 봉황단총, 백계관 품다

11시30분~12시: 차 도구에 대한 이야기와 안휘성 구화불차 품다로 마무리.


이 시간 우리나라 곳곳에서도 많은 찻자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 찻자리는 모두 그 순간 최고의 찻자리도 있었을 것이며, 소박한 가족의 잔 나눔도 있었을 것이다. 삶에서는 가족과의 찻자리가 가장 소중하다. 우리는 마치 식구들처럼 둘러앉았다. 그리고 집안의 귀한 차들을 꺼내어 특별한 날을 서로 기꺼워하며 보배들을 나누어 즐겼다. 배움에 즐거워하였고, 만남에 즐거워하였다. 더욱 큰 기쁨은 알고자 하는 것과 배워서 아는 기쁨, 그리고 만나고자 했지만 만날 수 없었던 존재와의 해후에서 보여 지는 확인과 실증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수많은 찻자리에서 이 찻자리는 정신적인 쉼터가 될 것이다.

이에 기록으로 남겨보고자 하였다.

남을 수 있는 찻자리는 흔하지 않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석우.